청호웹진 7월호

성보순례 4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 이기선 / 청호불교문화원 도서관장 -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경전이 국보로 지정되다

이 두루마리[卷子本]형식으로 된 성보는 공식 명칭을<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新羅 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周本)>불린다. 이 긴 이름은 이른바 닥종이란 불리는 흰 바탕의 종이에 먹글씨로 『대방광불화엄경』이란 경을 썼는데, 제작된 시기는 신라(755년, 경덕왕 13년)이며, 화엄경 중에서도 80권으로 구성된 주본(周本)을 따르고 있다는 의미를 담도 있다.

이 경전은 어느 개인의 손에서 1978년에 호암미술관(현재는 리움미술관 소장)에 수장되었고, 1979년에 국보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이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은 완질(完帙)이 아니고 1978년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花嚴經 周本)은 현재 2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축은 권1부터 권10까지, 나머지 한 축은 앞부분이 없어졌지만, 권44부터 권50까지 실려 있는 까닭에 80권이 10권씩 8축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존 상태는 너무 삭아서 보존처리를 거쳐 다시 장황[裝潢; 책이나 서화첩(書畫帖) 등을 꾸미어 만든 일]을 하였다.

이 두루마리의 표지는 자줏빛으로 물들인 종이 바탕에 겉에는 보상화문과 금강역사상을 그렸고 안쪽에는 변상도가 그려져 있는데, 금니(金泥)를 주로 사용하고 여기에 은니(銀泥)도 간간이 섞어 넣었다.

먹글씨로 쓴 두루마리는 너비가 29.2cm이며 이어 붙인 전체 길이는 1390.6cm이다. 내림글씨[縱書]로 한 줄에 대개 34자씩 맞춰 썼다. 각 축의 경전 내용이 끝나면 작은 글씨로 520여 자의 <조성기(造成記)>가 씌어 있다. 지면이 남아 있는 크기로 인하여 14행과 26행이라는 형식상의 차이가 보인다. 그러나 필체는 모두 일치하여 한 사람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두루마리 맨 끝은 나무에 붉은 칠을 한 ‘경심’(經心, 卷軸)을 붙여 종이를 돌돌 말 수 있도록 했다. 이 경심의 양 끝에 수정(水晶)으로 장식하였는데, 그 수정 안에 사리(舍利) 한 알[一顆]을 넣었다.

page 1.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제43
page 2.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제50, 造成記
page 3.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겉면 금강역사 변상도

조성기의 내용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조성기는 이두식 문장이다. 다시 말해 한문 성구가 들어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우리말의 어순으로 되어 있고, 토를 제외하면 모두 표의자(表意字)로 된 이두식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사경이 신라 시대부터 경전 신앙의 차원에서 성립되었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내용이라 할 것이다.

조성기는 내용에 따라 몇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사경(寫經) 작업의 경과, 발원(發願), 사경 작업, 서원시(誓願詩), 열함(列銜) 등의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이 화엄경을 만든 연대를 기록하고 있다. 즉 ‘천보13년 갑오 8월 1일초 을미재 2월 14일’이니 천보(天寶) 13년은 당 현종 13년으로 신라 경덕왕 13년이니 서기 754년에 해당하고, ‘을미재(乙未載)는 갑오 다음에 오는 간지(干支)이니, 755년이다. 따라서 조성 연대 및 기간은 754년 8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이듬해 2월 14일에 화엄경 한 부를 두루 이루었으니 6개월 14일이 소요된 것이다.

둘째 단락은 경 만들기를 발원한 사람과 그 까닭을 적고 있다. 발원한 사람은 황룡사(皇龍寺)의 연기(緣起) 법사로서, 부모님께 은혜를 갚고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불도를 이루게 하고자 발원하였다.

셋째 단락은 경을 제작하는 법식을 적고 있다. 이 부분을 원문을 풀어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닥나무는 재배할 때 나무뿌리에 향수를 뿌리면서 키워 닥 껍질을 벗겨 삶아서 종이를 뜬다. 이때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보살계를 받고 정성껏 종이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경문을 필사하는 사람이나 경심(經心)을 만드는 사람이나 불 보살상을 그리는 사람은 보살계를 받고 대·소변을 보거나 잠을 자고 난 뒤에나 밥을 먹은 뒤에는 반드시 향수를 사용하여 목욕을 해야만 한다.

사경할 때에는 모두 순(淳)한 신정의(新淨衣), 곤수의(褌水衣), 비의(臂衣), 관(冠), 천관(天冠)들로 장엄시킨 두 청의(靑衣) 동자가 관정침(灌頂針)을 받들며 여기에 네 사람의 기악인(伎樂人) 등이 함께 기악을 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향수를 가는 길에 뿌리고 또 한 사람은 꽃을 뿌리며, 한 법사는 향로를 받들고 이끌며 또 한 법사는 범패를 부르며 인도한다. 이 뒤를 여러 필사(筆師)들이 각기 향과 꽃을 받들고 불도(佛道)를 행할 것을 염하며 경을 만드는 곳에 도착한다. 사경소에 도착하면 삼귀의를 하면서 세 번 반복하여 예배하고 불보살에게 『화엄경』 등을 공양하고 자리에 올라 사경한다.

필사를 마치면 경심(經心)을 만들고 불 보살상을 그려 장엄하는데 이때는 청의동자와 기악인들은 제외되나 다른 절차는 마찬가지이고 마지막으로 경심 안에 한 알의 사리를 넣는다.

넷째 단락은 경을 조성한 공덕을 기리는 7언8구로 된 찬시(讚詩)이다.
내 지금 미래세 다하도록 서원하니
我今誓願盡未來
이뤄진 경전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所成經典不爛壞
만일에 삼재로 대천세계 깨질망정
假使三災破大千
허공과 더불어 흩어지지 아니하며
此經與空不散破
만일에 중생들 이 경전에 의지하면
若有衆生於此經
부처님 뵈옵고 법문 듣고 사리 모셔
見佛聞法敬舍利
보리심 내어서 물러서지 아니하고
發菩提心不退轉
보현행 닦아서 빨리빨리 성불하리
修普賢因速成佛

다섯째 단락은 이 사경 불사에 참여한 사람들 직책과 이름을 기록하였다.
직책은 크게 다섯 부류로 나뉘는데, 처음에 적은 사람은 지작인(紙作人) 즉 종이 만드는 사람으로 지금의 전남 장성 사람인 황진지(黃珍知) 나마(奈麻)이다.

두 번째는 경필사(經筆寫)로 글씨 쓰는 사람인데 모두 11명이다. 현재 지명으로 광주(光州) 사람 5인(阿干奈麻, 異純韓舍, 令毛大舍, 義七大舍, 孝赤沙弥), 남원(南原) 사람 2인(文英沙弥 卽孝大舍), 그리고 고부(古阜) 사람 4인(陽純奈麻, 仁年大舍, 屎烏大舍, 仁節大舍)이다. 세 번째는 경심장(經心匠)이니 경심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대경인(大京人) 2인(能吉奈麻, 弓古奈)이라 적고 있는데 대경은 당시 서울이 경주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다.

네 번째는 불보살상필사(佛菩薩像筆師)이니 경전에 그림을 그려 넣는 사람으로서 동경인(同京人) 4인(義本韓奈麻, 丁得奈麻, 光得舍, 知豆烏舍)을 적고 있는데, ‘동경인’이란 앞의 대경인과 같다는 뜻으로 풀이하면 역시 경주 사람이라 추정된다. 다섯 번째는 ‘경제필사(經題筆師)’ 이나 경전의 제명(題名)을 쓴 사람으로 경주 사람 동지(同智) 대사(大舍)로 그 아버지는 길득(吉得) 아찬(阿飡)이라고 적고 있다.

백지화엄경의 의의와 평가

국어사와 역사학의 중요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이두식 표현의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어 8세기 신라 시대의 언어 상태가 확인되며, ‘列銜(열함)’에는 사경 작업 시의 역할, 출신 지역, 직위, 성명 등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어 8세기 신라 사회의 역사적 특성이 드러난다. 신라 화엄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신라시대 문헌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당시 불교 뿐 아니라 서지학·미술사 등에서도 자료적 가치가 크다.

page 4.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
page 5.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장황을 새로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