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7월호

알레테이아,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 이야기 4

나를 주인으로 변화시키는 ‘철학적 글쓰기’

- 김영철 / 동국대학교 교수 -

참된 자아 발견을 위한 철학적 글쓰기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중시하는 삶을 산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과거는 무표정으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그 어떤 흔적도 자기 자신의 모습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아마도 우리는 현실적 삶에 대한 강박증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큰 중압감만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지 싶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의 삶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이어가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과거에 대하여 어떤 표정을 취하고 또한 그 표정을 보정하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삶은 ‘읽기’에서부터 시작한다. 16세기의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몽테뉴(M. de Montaigne)는 과거에 대한 성찰로부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는 곧 과거의 정신적 유산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은 독서, 즉 읽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읽기는 책과의 사귐이다. 책은 과거의 유산을 기록한 것이다. 성현들의 보석 같은 삶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부르면 언제라도 찾아오며, 원하면 항상 우리가 가는 길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도 하는 좋은 친구이다. 이런 친구와의 교제는 읽기이며,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page 마르틴 하이데거(출처 : 법보신문)

우리 자신은 ‘글쓰기’를 통해 주인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읽기는 좋은 친구와의 만남이다. 하지만 친구가 아무리 좋아도 나 자신은 아니다. 친구가 우리 자신의 삶에 이정표나 동반자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나 자신의 삶을 대신하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고 사색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책을 읽고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내용을 반드시 쓰도록 해야 한다. 읽기에서 멈춘다면 단지 좋은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는 데에서 그치게 된다. 하지만 글쓰기는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한다. 더 이상 친구와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진지하게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는 우리 자신, 즉 자아를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곧 더 이상 우리 삶에서 우리 자신을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주인으로 새롭게 변화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우리 자신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생각의 혼돈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냥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홍수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혼란스러워한다. 이러한 부담은 곧 생각을 단절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말처럼 “세상에 내던져져 있는 존재”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자신이 나아갈 방향도 찾지 못하고, 그저 그냥 세상에 자신을 떠맡긴 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잃어버린 우리 자신과 표정을 찾고 또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해야 한다. 이는 곧 자기 존재의 참된 의미를 찾고, 자기 스스로가 삶의 방향을 정립하는 것을 뜻한다. 사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세상에 내던져져 있는 존재”가 지닌 진정한 의미도 수동적으로 세상에 던져진 인간 스스로가 자기 모습을 능동적으로 성찰하여 새로운 자신으로 변화시키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니체(F. Nietzsche) 또한 글쓰기로 자신의 철학을 펼친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읽기는 남의 생각이며, 읽기에 그치는 것은 남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니체는 현재 처한 삶을 주체적으로 성찰하여 표현하는 글쓰기를 강조하며, 실제로 실천했다. 니체의 글쓰기는 아포리즘(aphorism)적 글쓰기로 유명하다. 쉽게 표현하자면 난해한 표현의 글쓰기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포리즘적 글쓰기는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하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의 글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니체는 비유적 표현이나 보편적이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비판적 사유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주체적인 생각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하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글쓰기야말로 ‘나’를 노예에서 자기 긍정과 자기 가치를 실현하는 주인으로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니체는 글쓰기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또한 글쓰기로 자기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이끌어 가는 능동적이며 주체적인 존재로 새롭게 탄생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니체는 “초인은 스스로 미래를 창조하고 개척하는 자”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는 철학적 글쓰기를 통해 인간은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찾고자 했던 참된 존재로서의 초인(Uebermensch)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page 출처 :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2219

철학적 글쓰기는 인간의 자기 삶과 관련한 주변의 양상(樣相) 모두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철학적 글쓰기를 할 때는 인간이 처해 있는 현재 상황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야스퍼스(K. Jaspers)는 인간이 처한 현재 상황을 “노상(路上)에 있는 존재(Auf-dem-Wege-Sein)”로 표현했다. 단순히 생각할 때, 이 상황은 그저 노상(路上), 즉 거리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있는 상태를 비유한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즉 어떤 방향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J.P. Sartre)는 “인간은 스스로 만드는(기획하는) 존재”라는 유명한 명제로 인간 존재의 주체성과 삶의 능동성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인간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이는 곧 인간, 즉 내가 나의 삶의 주인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적 글쓰기는 그저 수동적인 상태에 처해 있는 ‘나’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 즉 주인으로 변화시키는 행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