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7월호

음악의 전당 4

여름에 감상하고 싶은 음악

- 김준희 / 인천대학교 교수 -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존재, 물을 그린 피아노 작품으로 격조 있는 여름을 맞이해보자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 중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물’이다. 인간의 몸의 무게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물은 생존의 절대적인 요소이자,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의 형태이기도 하다. 특히 강, 호수, 바다, 안개, 비 등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물’은 여러 음악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물과 관련된 작품들을 하나씩 들어보면서 지루한 장마, 혹은 찌는듯한 무더위를 잊으면 좋겠다.

page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 (들라크루와, 1838),
출처 : wikipedia

피아노 작품 중 가장 익숙한 ‘물’에 관한 작품은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먼저 <빗방울 전주곡>을 떠올릴 것이다. 이 곡은 낭만주의 시대 피아노 음악을 대표하는 프레데릭 쇼팽 피아노 작품인 <24개의 전주곡 작품 28>의 열다섯 번째 곡으로, ‘빗방울’이라는 부제로 더 유명하다. 쇼팽은 이 작품에 특별한 제목을 붙이지 않았지만, 이 곡이 유명해지자 사람들이 별칭을 붙였다.

원래 전주곡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긴 모음곡의 시작이나 도입을 알리는 짧은 악곡이었으나, 19세기에 들어 그 의미가 사라지고, 독립된 악곡이 되었다. 쇼팽은 J.S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24개의 전주곡집을 작곡했는데, 바흐는 24개의 모든 조성을 반음씩 올라가는 순서로 배열했지만, 쇼팽은 5도관계(circle of fifth)로 구성했다. 왈츠, 마주르카 등과 함께 대표적인 소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 작품집은 쇼팽이 연인 조르주 상드와 함께 마요르카 섬에서 요양하는 동안 완성되었고, 특히 <빗방울 전주곡>은 그의 감성을 흠뻑 느낄 수 있는 곡이다.

page 쇼팽의 전주곡 <빗방울>의 자필 악보, 출처 : wikipedia

늦은 봄, 혹은 이른 여름 조용히 내리는 빗방울 소리를 연상시키는 Ab음은 곡 전체에 걸쳐 흐른다. 24곡의 전주곡 중 가장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인 이 곡은 병약해진 쇼팽의 심장박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3부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곡의 도입부는 편안하고 가벼운 느낌의 오른손 멜로디로 시작한다. C#단조로 전조되며 시작되는 무겁고 다소 비관적인 멜로디는 마치 우울한 먹구름이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마지막은 다시 시작 부분의 선율을 반복하며 끝맺는 이 짧은 작품은 폐결핵으로 건강을 잃은 쇼팽을 모성애적인 사랑으로 돌봐준 조르주 상드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상상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쇼팽의 피아노곡인 <바르카롤, 작품 60>은 일명 ‘뱃노래’로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모는 뱃사공의 노래에서 유래한 곡을 뜻한다. 마치 뱃사공이 일렁이는 물결 위를 노를 저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곡은 쇼팽이 조르주 상드와의 관계가 나빠졌을 때 작곡했다. 쇼팽이 세상을 떠나기 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시기이지만, 전체적인 곡의 느낌은 평온하다.

page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 출처 : wikipedia

전형적인 6/8박자의 뱃노래와는 달리 12/8박자를 사용한 이 곡은 전체적으로 긴 호흡의 유려한 멜로디 라인이 돋보인다. 일반적으로 뱃노래에서 그려지는 파도나 요동치는 배 등을 표현한 단조로운 리듬에 변화무쌍한 화성을 입혀 풍성함을 더했다. 또한 ‘피아노의 시인’답게 섬세하고도 정교한 선율들과 완벽한 구성미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음악학자 찰스 로젠이 그의 저서 <낭만주의 시대>에서 서술한 것처럼, 쇼팽은 복잡한 다성음악을 시적으로 연결하고, 미묘하게 변화하는 프레이즈를 실험적으로 조화롭게 구성하고, 절묘한 여백과 생기넘치는 내성들을 작품속에서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쇼팽과 더불어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으로 유명한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은 <순례의 해>이다. 모두 3권으로서 23개의 수록곡과 2권에 추가된 3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리스트가 여행을 통해 그 인상을 기록한 일종의 음악 기행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체가 완성되는데 40년이 걸린 만큼, 젊은 리스트의 화려한 기교 이상으로 낭만적 정서와 음악 속에 표현된 비르투오소적 요소들이 어우러진 세련미 넘치는 작품들이다.

<순례의 해> 제1권 ‘스위스’는 리스트가 1835년 그의 애인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스위스를 여행했을 때 그 추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집이다. 또한 많은 곡들에 대문호들의 시를 인용하고 있어, 리스트의 문학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원래는 <나그네의 앨범>이라는 모음곡집을 먼저 작곡했고, 이후 이것을 대대적으로 개편해서 새롭게 내놓았다. 이 첫 번째 작품집에는 ‘물’과 관련된 세 개의 곡을 만날 수 있다.

page 발렌슈타트 호수, 출처 : wikipedia

두 번째 곡인 <발렌슈타트 호수가에서>는 ‘발렌제’라고 불리는 스위스에서 가장 큰 호수의 풍경과 그 감상을 표현한 곡이다. 제츠강, 무르크바흐, 그리고 린트강으로 연결되어 취리히 호수까지 흐르는 이 호수를 리스트는 물결을 나타내는 듯한 왼손의 패시지 위에 잔바람이 부는듯한 오른손의 감미로운 선율로 그려냈다. 리스트는 바이런의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했다. “발렌슈타트 호숫가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거기에서 프란츠는 파도의 탄식과 노의 율동을 흉내낸 우울한 선율을 내게 작곡해 주었는데, 나는 이것을 들을 때마다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샘가에서>는 ‘스위스’의 네 번째 곡으로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도망자>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인용되었다. “속삭이는 청량함 속에 젊은 자연이 놀이를 시작하고”. 시의 내용처럼 청량한 분위기의 오른손 펼친화음과 그 위를 교차하는 왼손의 선율로 시작하는 이 곡은 음역의 확대와 함께 화성적으로도 풍성해지며 샘가의 일렁이는 물결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절제되고 차분한 분위기의 원숙미 넘치는 작품이지만, 리스트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이다.

다섯 번째 곡인 <폭풍우>는 앞의 두 곡과는 달리 격렬한 느낌의 작품이다. 바이런의 ‘밤과 폭풍’을 인용한 이 곡은 리스트의 젊은 시절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기교적으로 화려한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어디로 가십니까, 오, 폭풍! 목표는 무엇인가요?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것들과 같은가요? 아니면 독수리 같은 높은 둥지를 찾으시나요?”라는 인용문처럼 시작부터 급격하게 몰아치는 듯한 패시지들의 연속은 한여름밤의 뇌우를 연상시킨다. 연인과의 여행 속에서 느껴지는 격동적인 감정을 옥타브, 3도, 아르페지오 등으로 표현했다.

‘물’을 그려낸 쇼팽과 리스트의 작품들은 역동적인 에너지와 함께 아름답고 가슴을 울리는 선율들로 가득 차 있다.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존재인 물을 그린 피아노 작품으로 격조 있는 여름을 맞이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