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7월호

깨달음의 구현자, 붓다

침묵의 의미를 밝힌 분

- 이필원 / 청호불교문화원 연구소장 -

진정한 의미의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80년대 유명한 인도의 성자가 있다. 바로 ‘침묵의 성자’로 잘 알려진 ‘바바 하리 다스(Baba Hari Das)’란 분이다. 바바하리다스는 인도의 요가 수행자로 30년 넘게 말을 하지않고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작은 칠판에 써 사람들에게 전해서 ‘침묵의 성자’로 불리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성자를 무니(muni)라고 한다. 그리고 무니를 흔히 ‘침묵의 성자’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우리가 부처님을 석가모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사캬무니(Sakkamuni)라는 고대 인도어의 소리를 본 따 옮긴 것이다. 사캬무니는 ‘사캬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다. 부처님이 탄생한 종족의 이름이 석가족(Sakka, Śakya)이다. 씨족은 아딧짜(adiccā)이다. 아딧짜는 태양족이란 의미다. 이를 통해 부처님은 전형적인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한 종족 태생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옛날 농경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사회가 어디 있냐 라는 반문도 가능하겠지만, 부처님 탄생 당시 사회는 농경을 기반으로 한 상업이 발달하던 시기였기에 모든 종족이 농업을 기반으로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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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석가모니라는 말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사실은 침묵을 지켰지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혹은 말씀을 하셨더라도 우리가 보고 있는 경전에서처럼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이른바 초기경전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2,60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을 우리가 어떻게 정확히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경전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 그 안에 일관된 부처님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전통속에서 전승되어 온 경전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일치하고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도 우리는 부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2,600여 년의 시간 속에서 부처님의 모습은 다양하게 변화되었지만, 그 속에는 원형으로서 자리하는 부처님이 계신다. 우리는 바로 이 원형으로서의 부처님을 찾고자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방법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아마도 수행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직접 체험하는 일일 것이다. 그 체험으로 우리는 ‘침묵’의 의미도 또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럼, 부처님의 침묵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자. 침묵의 사전적 정의는 ‘아무말도 않고 잠잠히 있음’이다. 부처님의 침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 ‘10가지 질문 혹은 14가지 질문에 대한 침묵’이다. 이 내용은 ‘독화살의 비유’로 더 유명하다. 이와 관련된 경전이 『맛지마 니까야』 63번 경인 ‘말룽끼야에게 설하신 작은 경(Cūḷa-Māluṅkyasutta)’이다. 이 경전에서는 10가지 질문에 대한 붓다의 침묵이 기록되어 있다. 질문에 대해서 답하지 않음을 ‘무기(無記, avyākata)’라고 한다.

무기는 달리 난문(難問)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의미다. 무기에서 제시되는 질문은 크게 3개의 범주이다. ① 세계에 관한 난문 ② 명(命)과 육체에 관한 난문 ③ 여래에 관한 난문이다. 먼저 세계에 관한 난문은 ‘세계는 상주하는가? 상주하지 않는가?’,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의 4가지로 구성된다. 명(命)과 육체의 난문은 ‘명과 육체는 같은가? 별개인가?’의 2가지로 구성된다. 여래의 관한 난문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의 4가지로 구성된다.

이들 문제들을 보면, 뭔가 대단한 문제처럼 보인다. 실제 이러한 문제는 오랜 철학의 주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마치 진리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첫 번째 세계에 대한 난문에서 세계는 ‘우주’다. 이 우주는 영원한가, 그 끝은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천체물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두 번째 난문은 무상하고 소멸하는 육체와 형이상학적 원리로서의 정신이나 영혼과의 관계를 다루는 주제이다. 쉽게 표현하면 영혼과 육체의 관계 문제이다. 이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세 번째는 윤회를 벗어난 깨달은 존재는 사후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들 문제는 공통점이 있다. 즉 우리의 경험세계를 벗어난 질문이란 점이다. 우리가 얼음이 차가운가 뜨거운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경험을 통해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경험을 벗어난 질문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때는 자기의 생각이나 관점이 중심이 되어, 사실이 아닌 주장을 펼치게 된다.

부처님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왜 침묵하셨을까. 경전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page 출처 : 법보신문 (독화살을 맞은 사람)

“말룽끼야뿟따여, 만약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아서 그의 친구와 친척들이 의사를 불렀다고 가정합시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맞춘 사람이 끄샤뜨리야인지, 바라문인지, 바이샤인지 수드라인지 알 때까지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요. 또한 나는 나를 쏜 사람의 이름과 가문을 알 때까지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어떤 힘줄을 사용하여 활을 만들었는지 알 때까지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오.’

말룽끼야뿟따여, 이 사람은 이러한 것을 알기도 전에 죽을 것입니다. 말룽끼야뿟따여, 이것에 대해서 나는 왜 침묵할까요? 말룽끼야뿟따여, 이것은 유익한 것이 아니고, 범행(梵行)의 근본원리가 아니고, 싫증, 이탐(離貪), 소멸, 적정(寂靜), 승지(勝智), 정각(正覺), 열반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붓다의 침묵은 말 그대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렇쿵 저러쿵 말하지 않는 것이다. 바바 하리 다스처럼 말을 하지 않고 칠판에 자신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깨닫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지만,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없이 가르침을 펴신 분이 부처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제자들은 서로 모여있을 때, 법에 대해서 토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침묵속에서 지내야 한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내면의 재잘거림도 없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재잘거림을 그치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끊임없이 설하고, 토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