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바 있듯이 조성기는 이두식 문장이다. 다시 말해 한문 성구가 들어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우리말의 어순으로 되어 있고, 토를 제외하면 모두 표의자(表意字)로 된 이두식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사경이 신라 시대부터 경전 신앙의 차원에서 성립되었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내용이라 할 것이다.
조성기는 내용에 따라 몇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사경(寫經) 작업의 경과, 발원(發願), 사경 작업, 서원시(誓願詩), 열함(列銜) 등의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이 화엄경을 만든 연대를 기록하고 있다.
즉 ‘천보13년 갑오 8월 1일초 을미재 2월 14일’이니 천보(天寶) 13년은 당 현종 13년으로 신라 경덕왕 13년이니 서기 754년에 해당하고, ‘을미재(乙未載)는 갑오 다음에 오는 간지(干支)이니, 755년이다. 따라서 조성 연대 및 기간은 754년 8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이듬해 2월 14일에 화엄경 한 부를 두루 이루었으니 6개월 14일이 소요된 것이다.
둘째 단락은 경 만들기를 발원한 사람과 그 까닭을 적고 있다.
발원한 사람은 황룡사(皇龍寺)의 연기(緣起) 법사로서, 부모님께 은혜를 갚고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불도를 이루게 하고자 발원하였다.
셋째 단락은 경을 제작하는 법식을 적고 있다. 이 부분을 원문을 풀어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닥나무는 재배할 때 나무뿌리에 향수를 뿌리면서 키워 닥 껍질을 벗겨 삶아서 종이를 뜬다. 이때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보살계를 받고 정성껏 종이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경문을 필사하는 사람이나 경심(經心)을 만드는 사람이나 불 보살상을 그리는 사람은 보살계를 받고 대·소변을 보거나 잠을 자고 난 뒤에나 밥을 먹은 뒤에는 반드시 향수를 사용하여 목욕을 해야만 한다.
사경할 때에는 모두 순(淳)한 신정의(新淨衣), 곤수의(褌水衣), 비의(臂衣), 관(冠), 천관(天冠)들로 장엄시킨 두 청의(靑衣) 동자가 관정침(灌頂針)을 받들며 여기에 네 사람의 기악인(伎樂人) 등이 함께 기악을 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향수를 가는 길에 뿌리고 또 한 사람은 꽃을 뿌리며, 한 법사는 향로를 받들고 이끌며 또 한 법사는 범패를 부르며 인도한다. 이 뒤를 여러 필사(筆師)들이 각기 향과 꽃을 받들고 불도(佛道)를 행할 것을 염하며 경을 만드는 곳에 도착한다.
사경소에 도착하면 삼귀의를 하면서 세 번 반복하여 예배하고 불보살에게 『화엄경』 등을 공양하고 자리에 올라 사경한다.
필사를 마치면 경심(經心)을 만들고 불 보살상을 그려 장엄하는데 이때는 청의동자와 기악인들은 제외되나 다른 절차는 마찬가지이고 마지막으로 경심 안에 한 알의 사리를 넣는다.
넷째 단락은 경을 조성한 공덕을 기리는 7언8구로 된 찬시(讚詩)이다.
내 지금 미래세 다하도록 서원하니
我今誓願盡未來
이뤄진 경전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所成經典不爛壞
만일에 삼재로 대천세계 깨질망정
假使三災破大千
허공과 더불어 흩어지지 아니하며
此經與空不散破
만일에 중생들 이 경전에 의지하면
若有衆生於此經
부처님 뵈옵고 법문 듣고 사리 모셔
見佛聞法敬舍利
보리심 내어서 물러서지 아니하고
發菩提心不退轉
보현행 닦아서 빨리빨리 성불하리
修普賢因速成佛
다섯째 단락은 이 사경 불사에 참여한 사람들 직책과 이름을 기록하였다.
직책은 크게 다섯 부류로 나뉘는데, 처음에 적은 사람은 지작인(紙作人) 즉 종이 만드는 사람으로 지금의 전남 장성 사람인 황진지(黃珍知) 나마(奈麻)이다.
두 번째는 경필사(經筆寫)로 글씨 쓰는 사람인데 모두 11명이다. 현재 지명으로 광주(光州) 사람 5인(阿干奈麻, 異純韓舍, 令毛大舍, 義七大舍, 孝赤沙弥), 남원(南原) 사람 2인(文英沙弥 卽孝大舍), 그리고 고부(古阜) 사람 4인(陽純奈麻, 仁年大舍, 屎烏大舍, 仁節大舍)이다. 세 번째는 경심장(經心匠)이니 경심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대경인(大京人) 2인(能吉奈麻, 弓古奈)이라 적고 있는데 대경은 당시 서울이 경주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다.
네 번째는 불보살상필사(佛菩薩像筆師)이니 경전에 그림을 그려 넣는 사람으로서 동경인(同京人) 4인(義本韓奈麻, 丁得奈麻, 光得舍, 知豆烏舍)을 적고 있는데, ‘동경인’이란 앞의 대경인과 같다는 뜻으로 풀이하면 역시 경주 사람이라 추정된다. 다섯 번째는 ‘경제필사(經題筆師)’ 이나 경전의 제명(題名)을 쓴 사람으로 경주 사람 동지(同智) 대사(大舍)로 그 아버지는 길득(吉得) 아찬(阿飡)이라고 적고 있다.